民主主義를 위하여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다. 권력이 보통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이 투사가 되고 열사가 되던 시절이 일단락되는 것인가. 오래도록 잊고 살게되었던 당연한 풍경들, 당연한 상식들이 화제거리가 되고, 그렇게 사람들은 감격하는 듯이 보인다. 뭐가 어찌되었건, 세상이 적어도 조금은 달라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선거의 결과는 사실 거의 정해진 것이었지만 지난 십년 가까이 상식이 무너지고 합리가 부정당하는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불안했던 모양이다. 순리대로라면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2위를 차지한 후보가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은 차치하고라도 사람으로서의 자질조차도 의문스러운 인물이었다는 점, 그리고 사람으로서는 몰라도 정치인, 나아가서는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은 조금도 있어보이지 않는 사람이 3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씁쓸하고 불안한 결과이다. 이념의 조각조차 없는 이들이 이념이라는 명분 아래 뭉치고, 정치인으로서의 자격조차 제대로 따지지 못하면서 투표하는 ‘시민’들이, 작년 가을 이후의 세태를 지나고서도 유권자의 4할이 넘는다는 사실은, 문재인의 당선이라는 당연한 결과에 가려졌지만 불길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를 누리면서도 그것을 지키고, 그 가치를 추구하는데에 별반 관심이 없는 이들이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의 4할을 넘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편으로 느끼는 안도감 말고도 여전히 우울한 기분을 떨치기 힘들다. 물론 박근혜 당선의 그 밤과 같은 절망감과는 다르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 세상일들이, 전부가 그리 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순리를 따르고, 상식이 몰상식을 몰아내는 그런 사회가 될까하는 기대를 조금은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수의 보통의 사람들이 보통의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런 정상에 가까운 세상이 되어가는 계기가 되었을까 싶다. 그래서 아주 조금 가슴이 뛰고, 기대를 하게 된다. 15년 전 겨울의 어느 밤에 그러했듯이 말이다.

아니, 15년 전에는 조금이 아니었다. 바로 그 15년 전,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던 밤, 나는 잠을 거의 자지 못할 정도로 흥분했었다. 아직 새파란 나이였지만 이제야말로 정말 세상이 바뀌는구나 싶었다. 이제 나도, 허울만이 아닌 ‘민주공화국’에서 살아가는구나 싶었다. 민주주의가, 철이 들고나서 이 땅에서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민주주의 사회라는 곳에서 숨을 쉬는구나, 싶었다. 그런 흥분과 자부로 밤을 거의 샜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순진함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87년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는 순진무구한 생각을 가진 일부의 사람들과, 87년 이후를 살아가면서도, 그리고 87년 이전을 경험했으면서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치를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없는 다수의 사람들이 이 땅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노무현의 5년이 지나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지난 15년여는, 한국이라는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가치관 속에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세월이었다. 그리고 2017년 5월,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결과를 낳은 선거에서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확인한다.

그래서 15년 전만큼 흥분하지 못하며, 15년 전만큼 기대하지 못한다. 문재인이 제 아무리 철저한 민주주의자라 하더라도 사회의 다수가 민주주의자가 아닌 사회에서 그가 이룰 수 있는 일들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래도 문재인이 당선되는 사회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압도적 다수가 민주주의에 대한 나름의 신념과 가치를 지닌 사회라면 이번 선거의 결과도, 1위는 그대로라 하더라도 매우 다른 것이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여전히 갈 길은 너무 멀어서, 얼마를 더 가야할지도 모를 정도이다.

그러나 비관만 하고 푸념만 한다고 세상은 달라지지도 나아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래도 한국은 다시 한 번 민주주의자인 대통령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대통령의 성공을 간절하게 빈다. 그가, 민주주의자로서의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다음에도 또 다른 민주주의자가, 그리고 그 다음에도, 그리고 언젠가는 민주주의자가 아닌 이는 이 땅에서는 정치조차 못하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2017년 5월 9일, 우리는 마침내 그 출발선에 섰다.

民主主義를 위하여

2017년 5월 9일을 하루 앞둔 잡담

드디어 내일이 대통령 선거다.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치루는 선거. 전임자도 제 임기를 다 채우게 해서는 안된다고 믿었던 나로서는 너무 늦은 선거지만 그래도 십년이 걸리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어른 세 명과 초등학생 한 명, 그리고 개 한마리’가 서로 겨루는 선거라고, TV 토론을 본 누군가가 그랬단다. 그런데 불행히도 유력한 후보들 중에 어른은 한 명 밖에 없다. 슬프게도, 그것이 2017년 한국이다. 그것뿐이다.

‘문명 사회라면 홍 따위가’라는 식의 말이 그 동안 심심찮게 들렸다. 그런 표현을 접할 때마다 의아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까지 된 사회인데 뭘 지금와서 새삼스레, 싶었다.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혹 —난 그럴 가능성이 많다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다면 한국 사회에서 다시금 ‘민주주의’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것이라고,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다. 과연, 그리 되었다는 것이, 서글프다. 그리고 2017년, 내일이 지나서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건, 정말 그 누구라고 해도,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이제는 깨닫는 인구가 조금 늘었기를 바란다.

그래서 최소한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은, 적어도 ‘민주주의자’일 것. 민주주의에 대한 나름의 소신과 철학을 가질 것. 그리고 공공에 대한 의식과 책임에 대한 인식을 지닌 사람일 것. 공약과 정책이, 적어도 이번에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사실 대통령 한사람만이 아니라 300명 국회의원, 아니 이 사회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그래야겠지만 2017년 한국에서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사치이다. 그리고 지금은 사치를 부릴 때는 아닌 것 같다.

2017년 5월 9일을 하루 앞둔 잡담

지하철에서

얼마 전, 지하철을 탈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시간대여서 앉을 수도, 객차 안을 돌아볼 여유도 있었다. 얼마 가다가 몸이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도 부자유스럽고 표정도 달리 보이는 젊은 여성이 탔다. 젊다고 하기보다는 어리다고 해야할지도 몰랐다. 여성은, 타자마자 출입문 바로 옆에 붙어있는 손잡이를 꼭 잡고 섰다. 몸이 불편해서 저러는가, 앉는 편이 낫지 않나 하며 지켜보는데, 바로 다음 역에서 여성은 지하철을 내렸다. 한 정거를 가는 거였구나, 하며 창 밖의 플랫폼을 움직이는 그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 역은 마침 지상역으로 플랫폼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내려가야만 하는 구조였다. 지하철 출입문이 선 자리가 계단 바로 옆이었는데, 그 여성은 계단 앞까지 가서 조금 거리를 두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섰다. 특별할 것 없는 광경이지만 괜히 의아해보여 계속 그 여성을 보고 있다가 그의 품새를 보며 그 행동의 이유를 짐작하고 말았다. 여성은, 행인들이 자신을 지나쳐 먼저 내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내리던 모양새와 한정거 동안 손잡이를 꼭 잡고 있었던 걸로 보아, 여성은 아마도 계단을 손잡이 없이 내려가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즉, 어쩔 수 없이 한쪽 끝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를 잡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느린 몸으로 그저 기다리는 것 아니었을까. 지하철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여성의 좌우를 스쳐지나는 사람들을 보았다. 누구 하나 돌아보는 이 없이 그저 자신의 길을 갈 뿐이었다. 개중에는 바로 옆에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조차 못하는 듯한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지하철은 속도를 높였다.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 지 모르지만, 여성은, 경험이 없는 미숙한 이들로서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운증후군이나 자폐증을 가진 이들의 얼굴이, 미숙한 이들의 눈에는 다 같아 보이는 것과 같이, 그런 종류의 불편함을 가졌던 것 같다. 미숙하고 경험도 없는 나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저 내 눈에는, 그의 그런 행동이 매우 일상적이고, 그 자신에게는 전혀 새로울 것도, 특별히 괴로울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즉, 그에게 있어서는 사람들의 배려를 받으며 계단을 내려가는 일이 일상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이 기다리고 피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그리고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그가 그런 행동양식을 가지게 된 것이라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서 문득 그 여성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동정심의 발로가 아니라 나 또한 무정한 세상의 일부라는 자책에, 미안하고 서글펐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그 여성 스스로 그런 행동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불편한, 그래서 느린 몸이 바삐 길을 가는 다른 행인들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일부러 다른 이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던 것이라면, 그 여성의 배려는 또 얼마나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 오로지 그의 배려였건, 혹은 여러 해 동안의 경험에서 기인한 강요되다시피 체득된 ‘배려’였건, 이 사회가 몸이 불편한 사람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냉혹한 사회라는 사실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결국, 내가 목격한 그 여성의 행동은, 보다 살기 좋은 사회였다면 아마도 보기 힘든 장면이었을 것이다.

***

세상은 세월과 더불어 나아지는가. 적어도 십여 년 전까지는 그렇다고 믿어왔다. 그리고 그렇다고 배워왔다. 지난 십여 년은 믿어온 신념이 뒤틀리는 세월이었다. 앞으로의 세월은, 배워온 것들이 구현되는 세월이기를 빈다.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 약자들에 의한 ‘배려’는 보지 않아도 되는 사회. 결국 그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유사 이래 民은 언제나 약자였으니 말이다.

지하철에서

팔월 어느날

초저녁 무렵에 잠깐 연남동을 걷고 있었다. 길을 건너려 서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어떤 이가 그리 유창하지는 않은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대뜸 하는 말이 전화 좀 쓰잔다. 전화? 되묻는데 그 일행인듯 한 사람이 다가와서 자신의 전화기 화면의 한국 핸드폰 번호를 보여준다. 여기에 전화를 하고 싶단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 내 전화를 내어주었다. 번호까지 눌러서 주었더니 중국어로 통화를 한다. 사정을 설명했더라면 더 나은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대뜸 전화 좀 쓰자고 하니 나도 뭘 어찌 더 도울 길이 없다. 몇분인가 통화를 하는데 눈치가 숙소를 못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길을 잃었냐고 물으니 호텔에 가려고 한다고 한다. 어디서 왔냐고 의례적인 인사라도 할까 하던 참에 통화가 끝났다. 마치 쫓기기라도 하듯 부랴부랴 전화기를 돌려주더니 내가 가려던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서둘러 걸어간다. 잘 가라고 인사를 하고는 내 갈 길을 간다. 그래도, 너무 불쑥 대뜸 전화 좀 쓰자는, 요즘으로는 신선했다 싶었다. 짤막하게라도 사정을 설명했더라면 나았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건 또 나의 기준일 뿐, 난 도움을 청하는 이를 도와달라는만큼 도와주었고 그들에게는 그것이 충분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좋겠다.

팔월 어느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