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 어느날

초저녁 무렵에 잠깐 연남동을 걷고 있었다. 길을 건너려 서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어떤 이가 그리 유창하지는 않은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대뜸 하는 말이 전화 좀 쓰잔다. 전화? 되묻는데 그 일행인듯 한 사람이 다가와서 자신의 전화기 화면의 한국 핸드폰 번호를 보여준다. 여기에 전화를 하고 싶단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 내 전화를 내어주었다. 번호까지 눌러서 주었더니 중국어로 통화를 한다. 사정을 설명했더라면 더 나은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대뜸 전화 좀 쓰자고 하니 나도 뭘 어찌 더 도울 길이 없다. 몇분인가 통화를 하는데 눈치가 숙소를 못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길을 잃었냐고 물으니 호텔에 가려고 한다고 한다. 어디서 왔냐고 의례적인 인사라도 할까 하던 참에 통화가 끝났다. 마치 쫓기기라도 하듯 부랴부랴 전화기를 돌려주더니 내가 가려던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서둘러 걸어간다. 잘 가라고 인사를 하고는 내 갈 길을 간다. 그래도, 너무 불쑥 대뜸 전화 좀 쓰자는, 요즘으로는 신선했다 싶었다. 짤막하게라도 사정을 설명했더라면 나았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건 또 나의 기준일 뿐, 난 도움을 청하는 이를 도와달라는만큼 도와주었고 그들에게는 그것이 충분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좋겠다.

팔월 어느날

인사

직접 아는 얼굴이 아닌 상대라고 해서 인사를 하면 안된다는 규범이나 규칙은 없다. 인사에 인색해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득이 될 일도 없다. 여러 천만이 살아가는 땅 위에 어쩌다 같은 건물에 살게 된 이웃들과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다면, 혹은 하지 않는다면, 대체 인생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인사

告白

서울에 돌아와서 한동안은 외출이 싫을 정도로 짜증나는 경우가 많았다. 거의 모든 종류의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불성실하게 보였고, 거의 모든 행인들이 무례하게 느껴졌다. 생전 모르는 이들과 싸우는 일이 없었는데, 서울에 돌아와서 여러 달 동안, 두세 주에 한번씩 정도는 꼭 모르는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혹은 싸우곤 했다.

그러고 좀 더 지나서, 물론 서울 생활에 다시 익숙해져서이기도 하겠지만, 스스로 그러지 말자고 마음을 먹었다. 싸우게 되면 아무리 내가 정당하다고 해도 결국 한두가지는 반드시 상대방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그렇게 싸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달라질 것도 없고 심지어 나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서로 기준이 너무나 달라서— 상대에게 핏대를 올린들 손해보는 것은 나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사람이 좋기는 커녕 모나기가 그지없는 성격이지만, 사람 좋은 양, 웃어넘기자 싶었다.

오늘도 예전같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일을 이어서 둘이나 겪었다. 순간 흥분되는 기분을 느꼈지만, 넘기자 했다. 불쾌는 순간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넘기기를 잘했다 싶다. 내 흥분을 아낄 수 있었고, 처음 보는 이들에게 험한, 격한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그들의 몫일 뿐이다. 그들의 불행에 스스로를 관여시킬 필요는 조금도 없다. 그렇게 얼굴 대하는 이들과 거리를 두고, 이기적으로 정신을 지킨다.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살아가기 위한 작은 방편일 뿐이다.

서울은, 연약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에 용이한 곳이 아니다.

告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