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 어느날

초저녁 무렵에 잠깐 연남동을 걷고 있었다. 길을 건너려 서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어떤 이가 그리 유창하지는 않은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대뜸 하는 말이 전화 좀 쓰잔다. 전화? 되묻는데 그 일행인듯 한 사람이 다가와서 자신의 전화기 화면의 한국 핸드폰 번호를 보여준다. 여기에 전화를 하고 싶단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 내 전화를 내어주었다. 번호까지 눌러서 주었더니 중국어로 통화를 한다. 사정을 설명했더라면 더 나은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대뜸 전화 좀 쓰자고 하니 나도 뭘 어찌 더 도울 길이 없다. 몇분인가 통화를 하는데 눈치가 숙소를 못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길을 잃었냐고 물으니 호텔에 가려고 한다고 한다. 어디서 왔냐고 의례적인 인사라도 할까 하던 참에 통화가 끝났다. 마치 쫓기기라도 하듯 부랴부랴 전화기를 돌려주더니 내가 가려던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서둘러 걸어간다. 잘 가라고 인사를 하고는 내 갈 길을 간다. 그래도, 너무 불쑥 대뜸 전화 좀 쓰자는, 요즘으로는 신선했다 싶었다. 짤막하게라도 사정을 설명했더라면 나았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건 또 나의 기준일 뿐, 난 도움을 청하는 이를 도와달라는만큼 도와주었고 그들에게는 그것이 충분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좋겠다.

Advertisements
팔월 어느날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