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기억, 2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가 처음 국민학교(당시)를 들어갔을 적에는 보통 학부모가 –대부분 학생의 어머니들이지만– 사나흘이나 일주일 정도 학교에 따라오곤 했다. 처음 학교라는 데를 들어간 어린 아이들의 적응을 위해서였으리라. 어린 나는, 학교를 처음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사를 한 지도 얼마 안되었고,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않지만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다.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보다 한참을 더, 한 두주일 가까이 학교에 같이 따라왔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지 않았던 첫 날, 내가 학교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던 것은, 기억에 있다. 그러나 물론 곧 그런 ‘부적응’ 기간은 지나간다. 이름들까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내 친구들이 생겨서 학교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이리저리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돌아가곤 한 기억도 난다.

대구라는 도시에 가서 처음 살았던 아파트는, 아직도 –2008년 여름– 그대로 있다. 그 시절에만 해도 아파트, 특히나 1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곳은 새로 지은 ‘고층’의 아파트였는데, 방이 세개인 자그마한 곳이었다. 기역자의 건물 한 동이었는데, 요즘의 아파트들보다 정원도 꽤나 넓었고 매우 널직한 놀이터도 있었다. 넓은 정원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국민학교 2학년 때인가, 어느 겨울 대구에 눈이 왔었다. 그 즈음의 대구는, 눈이 내리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어서 눈이 온 것이 꽤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해 겨울, 바로 그 때 난 감기에 걸려있었다. 집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고, 동생만 나가서 눈사람을 하나 저 혼자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의 동생 사진이, 아직 서울집 앨범들 사이에 남아 있다. 빨간 모자달린 코트를 입고 볼까지 빨개져서 웃는 동생 사진이 말이다.

처음 대구로 이사를 가고, 처음 학교라는 데를 가면서 어린 나는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그 중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 내 말투였다. 학교에서는 주변의 누구를 돌아보아도 대구 사투리. 어린 마음에 혼자 다른 억양의 말을 하는 것이 대단한 스트레스였다. 얼마나 그게 심리적인 부담이었으면 집에서 외출하기 전에 꼭 대구 억양을 연습하곤 할 정도였다. 어린 내가 연습을 한들 제대로 흉내를 낼 리는 만무했지만, 그렇게 남들과 달라보이는 것이, 어릴 적에는 심리적인 부담이었다. 물론 내성적인 내 성격 탓도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사투리 문제’는 이내 해결이 된 듯하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다들 사투리를 쓰니 자연스레 입에 익었던 것 같다. 다만, 집에서는 예전에 쓰던 말을 그대로 썼던 탓에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는 ‘두가지 말’을 동시에 쓰며 살고 있었고, 훗날 친구들 앞에서 집에 전화라도 할라치면 신기한 놈이라는 눈초리를 받곤 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내 동생에게도 그런 말의 구별은 있었는데, ‘대구 억양’을 사용하는 대상이 세상에 유일하고 그 대상이 바로 저의 오빠라는 사실이다. 나는 불과 몇년 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와 나의 차이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훗날, 대학에 들어가고나서 주변의 말투가 다시 바뀌자 자연스레 집에서 쓰던 말이 밖에서도 쓰는 말이 되어버렸는데, 그 탓에 대학에서 새로이 만난 친구들에게도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으면서도 사투리가 없는 신기한 놈이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처음 들어간 학교는 그리 오래 다니지 못한다. 내가 3학년 때 우리 식구는 미국으로 이사를 한다. 아버지의 공부를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직 외국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까지야 그런 사실을 그때는 몰랐지만, 정작 출국하기 전에 서울에서 한달 넘게 머물러야 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온갖 수속들 때문이었으리라.

서울에서는 외가에서 지냈다. 바로 그 무렵이었는데 어느 날 오후, 외가의 거실에 켜놓은 TV에서 실제 공습경보가 나왔었다. 실제상황이라는 다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모두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다만, 내 외조부만은 급히 일어나셔서 아이들에게 긴소매 옷을 입히라고 하시며 당신도 잠바를 꺼내 입으셨다. 놀라고 당황한 탓이었을까. 외조부모 앞에서 난 참으로 이기적인 한마디를 해버린다. 요컨대 우리가 미국에 가기 직전이었다는 이야기다. 이 경보는 결국 북에서 귀순해오는 전투기 탓이었고,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난 오늘까지도 이날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제는 두분 다 돌아가셨지만, 나의 외조부모는 그 어린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날, 웃으시던 외할머니 얼굴도, 기억에 있다.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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