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기억, 1

난, 1970년대에 태어났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신기하게도 만 두살 이전이다. 갓 걸음마를 하던 시절일 것으로 추측하는데, 내가 나서 한두해 살았던 집의 앞마당에 놓여져 있던 물통 안을 들여다보던 기억이 있다. 물론, 이 기억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서 그 다음의 그 시절과 그 집, 그 마당에 대한 기억은 더는 없다. 가끔 이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머리 속에 의식하는 기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기는 서울에서 났지만,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곧 대전으로 이사를 간다. 빠듯한 살림의 젊은 부부였던 내 부모는, 몇차례 대전에서 이사를 한다. 셋방살이를 한 적은 없다고 알고 있지만, 그리 길지 않은 동안 전세살이를 벗어나지 못했었던 것 같다. 내가 서너살 쯤 이사한 곳에서, 이삿날 어머니가 막 이사 들어온 집의 마루에 앉아 나와 내 동생에게 이곳이 ‘진짜 우리집’이라고 말하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간 살아 온 다른 집들도 우리집은 우리집이었는데 하고 말이다. 아마도 그 집이, 내 부모가 처음으로 제 소유로 만든 집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대전이라는 도시의 기억은, 마치 무성영화나 매우 낡은 사진 같은 느낌만 남아있다. 우리 형제가 어머니 손을 잡고 다니던 소아과 병원, 조금 어두운 그 병원 진료실 안의 아기용 체중계, 여름철이 되면 내다 걸리던 냉면 깃발, 내 부모가 다니던, 그리고 우리도 따라가서 앉아 놀던 테니스 코트 같은 것들이 단편적인 장면들로 남아있다. 무척이나 고요하고 느리게, 그렇게 지나가던 세월이었다.

그런 대전의 기억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자주 집으로 들이닥치던 아버지의 학생들이다. 나의 아비는 젊어서부터 줄곧 대학에서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시절에는 정말 매일같이 학생들이 집까지 와서 놀다가곤 했다. 내 아비가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인 탓도 있겠지만, 아마 그 학생들과 별로 나이 차이가 없었던 덕이기도 했을 것이다. 대전에 우리 가족이 살던 시절, 나의 아비는 지금의 나보다도 젊은 서른 전후의 나이였다.

자주 우리집을 드나들던 학생들은, 나와 내 여동생을 귀여워해주었다. 그러나 우리 형제는 어려서는 무척이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어머니 뒤에 숨거나 심지어는 집 거실의 커텐 뒤에 숨어서 그들을 피하곤 했다. 어린 우리들의 그런 낯가림이 가끔은 웃음거리, 재밌는 화제가 될 정도였다. 아직도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학생들은, 그리고 아직도 아버지와 교류가 있는 학생들은 그 시절에 나를 귀여워해주던, 그들 뿐이라고 알고있다.

아직 70년대가 끝나지 않았던 어느날 우리 가족은 다시 수도권으로 이사를 한다. 1년 남짓,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부천에 자리를 잡는다. 아버지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여자 대학에서 가르치고, 이 즈음부터 어머니도 시간 강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어린 나와 내 동생은, 어머니가 어딘가 고정적으로 나가는 데가 있는 것이 싫었다. 어디 가냐고 묻고 학교 다녀온다고 대답하면 우리 형제가 싫은 티를 내서 그랬는지, 어느날인가 하루 어머니는 학교에 가면서 다른 곳을 간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거짓말을, 좀 지나 알게 된 나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내 부모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 이전의 나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의 구체적인 내용도 어떻게 그 거짓의 진실을 알게 되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당시의 충격만은, 선명하다. 그 충격이 내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 즈음 또 하나 커다란 충격을 받는 일이 있다. 얼마 전에도 썼던 것처럼 나의 외증조부가 돌아가시는 일이 그것이다. 외증조부와 심리적으로 전혀 가깝지 않았었지만, 그렇게 나는 죽음의 존재를 배운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나 자신 또한 유한한 존재라는 자각을 수반했던 것 같다. 이렇게 숨쉬고, 웃고, 떠들고, 놀던 내가 언제인가 없어진다는 사실, 그리고 세상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제 갓 유치원을 다니던 아이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다. 일주일 남짓, 침울하게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그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나를 괴롭히던 영상과 상상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그로부터 여러 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극복하고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일상적’으로 의식하는 내 버릇은, 이 때 시작된 것이 아닐까.

부천에서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은 마당이 꽤 넓은 집이었다. 마루에서 내다보이는 정원에는, 아버지가 사와서 심은 나무도 있었고, 마당이 넓었던 덕에 나와 동생은 마당에서 노는 게 일이었다. 숫기 없는 내 성격 탓에 유치원을 다니면서도 나는 그다지 친구가 많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내 가장 좋은 친구는 나보다 한살 어린 내 동생이었던 것 같다. 조금 더 크면서, 그리고 그 이후 한참 동안 늘 오빠 때문에 고생이 많은 동생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같이 잘 놀았다고 기억하는 저 시절부터 이미 동생은 나 때문에 이런저런 괴로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천에서는 그리 오래 지내지 않았다. 아버지가 대구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셨기 때문이다. 그 탓에 나는 다니던 유치원을 제대로 졸업도 못하고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이사간 대구에서 나는 국민학교(당시)에 입학한다. (이어짐)

**왜 이런 개인적인 기억들을 줄줄이 늘어 놓을 생각이 들었는지는 설명하기 힘들다. 어쩌면, 어수선한 세월에 지난 시절들 돌아보다 그리 된 것인지도 모른다. 동기와 이유가 어떻든, 짧게나마 기억들을 기록해 둘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쓰다보면 막히기도 하고, 지겨워지기도 하며, 의욕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미리 예고하지 않는다. 그저, 기약없이 이어진다고만 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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