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조선’ 논쟁을 보며 – 잡담 한마디

어제, 오늘의 난데없는 ‘안티조선’ 관련 논쟁을, 조금 늦게 접했습니다. 트랙백들을 따라가고, 다시 따라가며 수많은 글들을 접했습니다. 그러고나니 여러가지 의미에서 참 복잡합니다. 그리고 혼자 싱숭생숭해 하며, 할 일을 뒷전으로 한채 이러고 있습니다.

역시나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이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왜 저들은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인지, 마찬가지로 저들의 눈에 보이는 것들이 왜 내 눈에는 닿지 않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 집니다. 개인들의 역사와 환경과 배경과 그 배움의 차이가 결국 서로 다른 시야와 관점을 만들어 준 것이겠지만, 그렇게 이해하면서도, 같은 세상을, 같은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의 사이에 이렇게나 큰 간격이 생긴 이유를, 그 원인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작년에,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느즈막히 공부한다고 외국에 나와 있던 탓에, 그리고 하필 가장 바쁜 시기였던 탓에, 그만 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지금까지도 가끔, 죄송스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게다가, 제게는 마지막으로 살아계셨던 조부모님이셨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실은 저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한번도 좋아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아주 어렸던 시절에는 무섭고, 엄격한 분이라 그랬습니다. 같이 밥을 먹을 때도, 숟가락질 하나, 젓가락질 하나에 신경써야만 했고, 먹기 싫은 것이 있어도 꼭 골고루 잘 먹어야 했습니다. 어린 제가 할아버지를 좋아할 수 없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크고, 제 나름으로 세상을 판단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된 이후에는, 그 생각과 가치를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3공과 4공 시설에 건교부 관료를 지내시고, 후에 공기업을 거쳐 민간 기업의 간부로 은퇴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심지어 박정희의 졸렬한 글씨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자랑스레 걸어두시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전 할아버지를 싫어하지도 않았습니다. 제 할아버지셨으니까요. 가족이란, 그 사상과 가치관과 관계없이, 서로 손 잡고 마주할 수 있는 관계이니까요. 오래 전, 외가에서 며칠 머물 일이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할아버지는 항상 새벽에 일찍 일어나셔서 마당에서 운동을 하셨었는데, 문득 잠이 깨서 보니 할아버지께서 제 이불을 고쳐주시고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주신 적이 없었던 분이, 그렇게 새벽에 운동을 나가시며 제 잠자리를 봐 주시는 걸 보며, 잠든척 한 채,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마음의 한켠을 느낀 기분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날 그 새벽의 경험 하나가, 오늘까지 할아버지를 향한 감정의 큰 부분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닌 건 아닌 겁니다. 틀린 건 틀린 겁니다. 하지만 언젠가, 할아버지의 세대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문득 한 적이 있습니다. 가난했던 시절, 역사를 전면적으로 부정해야만 했던 시절, 자유니 평등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가치들보다, 밥 한 톨, 돈 일원이 더 소중했던 시절. 물론 그 시절을 모조리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오늘의 한국사회의 모든 부조리와 왜곡은 궁극적으로 저 시절의 잘못된 선택에 기인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저, 그 시절이었다면 그릇된 길을 바른 길이라 믿게 될 가능성이 더 컸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납득하려고 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지만, 받아들여서 안되겠지만, 우리 할아버지셨거든요.

그런데, 오늘 2005년의 한국에서, 배 고파 본 적도 없는 이들이, 자유를 위해 싸워본 적 없는 이들이, 지금 자신들이 내뱉는 말 한마디의 자유를 위해 얼마나 많은 선배들이 피를 흘렸는지 관심조차 없는 이들이, 지나간 어긋난 세월의 가치들을 지향하고, 그것을 대변하는 매체를 옹호한다는 것은, 납득할래야 납득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언제가 다른 글에서 짤막하게 썼지만, “새옷인 줄 알고 사서 입어봤는데, 사이즈도 안 맞고, 어딘가 좀 더럽기도 하다고 해서, 몇십년 전에 버리려고 치워두었던 쓰레기같은 누더기를 꺼내 입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하지만 저렇게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고 제게는 느껴지는 논리와 언설들에, 여전히 공감을 표하는 이들이 수없이 존재합니다. 당혹스럽고, 의아할 따름입니다.

2005년 일본사회에서 헌법9조와 수상의 야스쿠니 참배, 천황에 대한 의견과 주장들이 한 개인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믿습니다만, 마찬가지로 2005년 한국사회에서도 그런 ‘절대적’ 잣대가 존재하지 않을까요? ‘절대적’이라고 하면 너무 ‘편협’한 것이 될까요? 글쎄요, 조금 편협해 보일지언정, 그렇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틀린 것’, ‘옳지 않은 것’마저 용인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끝으로, 좋은 글을 하나 추천하고 싶습니다. 저는 수양이 부족한 탓에,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만, 그렇게 정리 해 주신 분이 있습니다. 저 글의 한마디, 한마디에 공감을 표하면서, 소개합니다.
-틀린 것은 다른 것이 아닌데… 계속되는 안티조선 관련 글들.
(김도연님의 블로그에서)

덧붙임) 묘한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쓴 글이라,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글인지, 쓴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복잡한 마음에서의 잡담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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