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ino

알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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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계신지 모를 구독자들께 알립니다.

블로그를 방치한 지 한달이 넘습니다. 그간 저는 미투데이와 Tumblr에 꾸준히 흔적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계속 이런 체제가 유지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블로그를 완전히 정리하거나, 혹은 포기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유 –시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가 생겨서, 조금 긴 글이 나오면, 그것은 이 공간에 저장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사소한 일상의 잡담들이나, 취미의 수준조차도 되지 못하는 사진들로 이곳을 채우는 것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는, 블로그를 통해서 용돈을 벌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이루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간을 여러 해에 걸쳐서 유지해 오고, 또 유지해 나가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행위가 즐겁고, 또 어떻게든 세상을 향해 ‘말’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욕구가 없어지지 않는 한, 즐거움이 괴로움이 되지 않는 한 제 ‘말’은, 그 형태가 어찌 되든 계속 될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은, 확고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추측컨대 이 블로그의 구독자 분들은 소수일 것이고, 또 저의 행적(?)을 잘 알고 계실 것이기에 굳이 이런 알림글을 쓰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떤 경우에나 예외는 있을테고, 또 그보다도 저 스스로 이렇게 획을 긋고 동서남북을 정리하려는 의도로 이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사소한 저의 흔적들로 통하는 링크를 알려드리고 글을 끝내겠습니다.

Homepage / me2day / Tumblr / Twitter

Written by camino

March 3, 2009 at 8:0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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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기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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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가 처음 국민학교(당시)를 들어갔을 적에는 보통 학부모가 –대부분 학생의 어머니들이지만– 사나흘이나 일주일 정도 학교에 따라오곤 했다. 처음 학교라는 데를 들어간 어린 아이들의 적응을 위해서였으리라. 어린 나는, 학교를 처음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사를 한 지도 얼마 안되었고,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않지만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다.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보다 한참을 더, 한 두주일 가까이 학교에 같이 따라왔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지 않았던 첫 날, 내가 학교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던 것은, 기억에 있다. 그러나 물론 곧 그런 ‘부적응’ 기간은 지나간다. 이름들까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내 친구들이 생겨서 학교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이리저리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돌아가곤 한 기억도 난다.

대구라는 도시에 가서 처음 살았던 아파트는, 아직도 –2008년 여름– 그대로 있다. 그 시절에만 해도 아파트, 특히나 1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곳은 새로 지은 ‘고층’의 아파트였는데, 방이 세개인 자그마한 곳이었다. 기역자의 건물 한 동이었는데, 요즘의 아파트들보다 정원도 꽤나 넓었고 매우 널직한 놀이터도 있었다. 넓은 정원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국민학교 2학년 때인가, 어느 겨울 대구에 눈이 왔었다. 그 즈음의 대구는, 눈이 내리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어서 눈이 온 것이 꽤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해 겨울, 바로 그 때 난 감기에 걸려있었다. 집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고, 동생만 나가서 눈사람을 하나 저 혼자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의 동생 사진이, 아직 서울집 앨범들 사이에 남아 있다. 빨간 모자달린 코트를 입고 볼까지 빨개져서 웃는 동생 사진이 말이다.

처음 대구로 이사를 가고, 처음 학교라는 데를 가면서 어린 나는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그 중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 내 말투였다. 학교에서는 주변의 누구를 돌아보아도 대구 사투리. 어린 마음에 혼자 다른 억양의 말을 하는 것이 대단한 스트레스였다. 얼마나 그게 심리적인 부담이었으면 집에서 외출하기 전에 꼭 대구 억양을 연습하곤 할 정도였다. 어린 내가 연습을 한들 제대로 흉내를 낼 리는 만무했지만, 그렇게 남들과 달라보이는 것이, 어릴 적에는 심리적인 부담이었다. 물론 내성적인 내 성격 탓도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사투리 문제’는 이내 해결이 된 듯하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다들 사투리를 쓰니 자연스레 입에 익었던 것 같다. 다만, 집에서는 예전에 쓰던 말을 그대로 썼던 탓에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는 ‘두가지 말’을 동시에 쓰며 살고 있었고, 훗날 친구들 앞에서 집에 전화라도 할라치면 신기한 놈이라는 눈초리를 받곤 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내 동생에게도 그런 말의 구별은 있었는데, ‘대구 억양’을 사용하는 대상이 세상에 유일하고 그 대상이 바로 저의 오빠라는 사실이다. 나는 불과 몇년 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와 나의 차이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훗날, 대학에 들어가고나서 주변의 말투가 다시 바뀌자 자연스레 집에서 쓰던 말이 밖에서도 쓰는 말이 되어버렸는데, 그 탓에 대학에서 새로이 만난 친구들에게도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으면서도 사투리가 없는 신기한 놈이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처음 들어간 학교는 그리 오래 다니지 못한다. 내가 3학년 때 우리 식구는 미국으로 이사를 한다. 아버지의 공부를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직 외국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까지야 그런 사실을 그때는 몰랐지만, 정작 출국하기 전에 서울에서 한달 넘게 머물러야 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온갖 수속들 때문이었으리라.

서울에서는 외가에서 지냈다. 바로 그 무렵이었는데 어느 날 오후, 외가의 거실에 켜놓은 TV에서 실제 공습경보가 나왔었다. 실제상황이라는 다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모두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다만, 내 외조부만은 급히 일어나셔서 아이들에게 긴소매 옷을 입히라고 하시며 당신도 잠바를 꺼내 입으셨다. 놀라고 당황한 탓이었을까. 외조부모 앞에서 난 참으로 이기적인 한마디를 해버린다. 요컨대 우리가 미국에 가기 직전이었다는 이야기다. 이 경보는 결국 북에서 귀순해오는 전투기 탓이었고,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난 오늘까지도 이날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제는 두분 다 돌아가셨지만, 나의 외조부모는 그 어린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날, 웃으시던 외할머니 얼굴도, 기억에 있다. (이어짐)

Written by camino

January 31, 2009 at 12:29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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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기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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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1970년대에 태어났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신기하게도 만 두살 이전이다. 갓 걸음마를 하던 시절일 것으로 추측하는데, 내가 나서 한두해 살았던 집의 앞마당에 놓여져 있던 물통 안을 들여다보던 기억이 있다. 물론, 이 기억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서 그 다음의 그 시절과 그 집, 그 마당에 대한 기억은 더는 없다. 가끔 이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머리 속에 의식하는 기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기는 서울에서 났지만,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곧 대전으로 이사를 간다. 빠듯한 살림의 젊은 부부였던 내 부모는, 몇차례 대전에서 이사를 한다. 셋방살이를 한 적은 없다고 알고 있지만, 그리 길지 않은 동안 전세살이를 벗어나지 못했었던 것 같다. 내가 서너살 쯤 이사한 곳에서, 이삿날 어머니가 막 이사 들어온 집의 마루에 앉아 나와 내 동생에게 이곳이 ‘진짜 우리집’이라고 말하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간 살아 온 다른 집들도 우리집은 우리집이었는데 하고 말이다. 아마도 그 집이, 내 부모가 처음으로 제 소유로 만든 집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대전이라는 도시의 기억은, 마치 무성영화나 매우 낡은 사진 같은 느낌만 남아있다. 우리 형제가 어머니 손을 잡고 다니던 소아과 병원, 조금 어두운 그 병원 진료실 안의 아기용 체중계, 여름철이 되면 내다 걸리던 냉면 깃발, 내 부모가 다니던, 그리고 우리도 따라가서 앉아 놀던 테니스 코트 같은 것들이 단편적인 장면들로 남아있다. 무척이나 고요하고 느리게, 그렇게 지나가던 세월이었다.

그런 대전의 기억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자주 집으로 들이닥치던 아버지의 학생들이다. 나의 아비는 젊어서부터 줄곧 대학에서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시절에는 정말 매일같이 학생들이 집까지 와서 놀다가곤 했다. 내 아비가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인 탓도 있겠지만, 아마 그 학생들과 별로 나이 차이가 없었던 덕이기도 했을 것이다. 대전에 우리 가족이 살던 시절, 나의 아비는 지금의 나보다도 젊은 서른 전후의 나이였다.

자주 우리집을 드나들던 학생들은, 나와 내 여동생을 귀여워해주었다. 그러나 우리 형제는 어려서는 무척이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어머니 뒤에 숨거나 심지어는 집 거실의 커텐 뒤에 숨어서 그들을 피하곤 했다. 어린 우리들의 그런 낯가림이 가끔은 웃음거리, 재밌는 화제가 될 정도였다. 아직도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학생들은, 그리고 아직도 아버지와 교류가 있는 학생들은 그 시절에 나를 귀여워해주던, 그들 뿐이라고 알고있다.

아직 70년대가 끝나지 않았던 어느날 우리 가족은 다시 수도권으로 이사를 한다. 1년 남짓,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부천에 자리를 잡는다. 아버지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여자 대학에서 가르치고, 이 즈음부터 어머니도 시간 강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어린 나와 내 동생은, 어머니가 어딘가 고정적으로 나가는 데가 있는 것이 싫었다. 어디 가냐고 묻고 학교 다녀온다고 대답하면 우리 형제가 싫은 티를 내서 그랬는지, 어느날인가 하루 어머니는 학교에 가면서 다른 곳을 간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거짓말을, 좀 지나 알게 된 나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내 부모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 이전의 나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의 구체적인 내용도 어떻게 그 거짓의 진실을 알게 되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당시의 충격만은, 선명하다. 그 충격이 내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 즈음 또 하나 커다란 충격을 받는 일이 있다. 얼마 전에도 썼던 것처럼 나의 외증조부가 돌아가시는 일이 그것이다. 외증조부와 심리적으로 전혀 가깝지 않았었지만, 그렇게 나는 죽음의 존재를 배운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나 자신 또한 유한한 존재라는 자각을 수반했던 것 같다. 이렇게 숨쉬고, 웃고, 떠들고, 놀던 내가 언제인가 없어진다는 사실, 그리고 세상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제 갓 유치원을 다니던 아이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다. 일주일 남짓, 침울하게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그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나를 괴롭히던 영상과 상상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그로부터 여러 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극복하고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일상적’으로 의식하는 내 버릇은, 이 때 시작된 것이 아닐까.

부천에서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은 마당이 꽤 넓은 집이었다. 마루에서 내다보이는 정원에는, 아버지가 사와서 심은 나무도 있었고, 마당이 넓었던 덕에 나와 동생은 마당에서 노는 게 일이었다. 숫기 없는 내 성격 탓에 유치원을 다니면서도 나는 그다지 친구가 많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내 가장 좋은 친구는 나보다 한살 어린 내 동생이었던 것 같다. 조금 더 크면서, 그리고 그 이후 한참 동안 늘 오빠 때문에 고생이 많은 동생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같이 잘 놀았다고 기억하는 저 시절부터 이미 동생은 나 때문에 이런저런 괴로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천에서는 그리 오래 지내지 않았다. 아버지가 대구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셨기 때문이다. 그 탓에 나는 다니던 유치원을 제대로 졸업도 못하고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이사간 대구에서 나는 국민학교(당시)에 입학한다. (이어짐)

**왜 이런 개인적인 기억들을 줄줄이 늘어 놓을 생각이 들었는지는 설명하기 힘들다. 어쩌면, 어수선한 세월에 지난 시절들 돌아보다 그리 된 것인지도 모른다. 동기와 이유가 어떻든, 짧게나마 기억들을 기록해 둘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쓰다보면 막히기도 하고, 지겨워지기도 하며, 의욕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미리 예고하지 않는다. 그저, 기약없이 이어진다고만 해 두자.

Written by camino

January 29, 2009 at 2:3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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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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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신문(産經新聞)을 신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산케이를 인용하는 매체도 신뢰하지 않는다. 산케이를 읽는 이도 상대할 생각이 없다.

일본 iTunes App Store에서는 산케이신문을 볼 수 있는 무료 애플리케이션이 인기다. 평가도 매우 좋다.

Written by camino

January 24, 2009 at 11:35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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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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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취임식 중계를 인터넷으로 보았다. 그의 취임 연설까지 듣고 잤다. 남의 나라 대통령이 누가 되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오바마에 관한한 나는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유색인종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지, 아주 조금은 짐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정치적 입장이 어떠하건, 사실 그것은 이 역사적인 순간에 오히려 부차적일지 모른다. 물론 그의 정치적 입장이 지금의 그를 만든 원동력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고, 그 이면에는 전임자의 막대한 실패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로도 오바마의 등장과 당선, 그리고 취임이라는 거대한 의미를 퇴색시키거나 반감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로써 세상은, 분명히 어제와는 다른 세상이 되었다. 내가 숨쉬는 공기는 어제의 그것이고, 내가 눈부셔하는 햇살 또한 어제의 그것에 다름아니지만, 내가 느끼지 못하는 어느 순간, 세상은 달라졌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당신이, 우리 모두가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나의 기대이고, 희망이며, 확신이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는 세상도 있다. 태평양 건너에서, 200만이 넘는 인파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축하하고, 온 세계 각처에서 그 순간을 주목하는데 극동의 작은 반도에서는 경찰에 떠밀려 쓰러지는 ‘시민’들이 속출한다. ‘민주’와 ‘자유’의 기치를 내걸고, 그 정신을 헌법에 명기한 땅에서, 시민도 권리도 인권도 평등도 민주도 없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과격 시위를 비난하는 염치가 용인이 되고,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하나 없다. 그런 이들이 반도를 이끌고, 그런 이들이 나라를 움직인다.

그러나 정말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 집단이 정권을 장악하고 시대가 몇십년 거꾸로 간 것 같다고 하지만, 우리 모두 잘 알듯이 시대는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다. 먹고사는 문제가 절체절명의 문제였던 시절, 오로지 먹이고 입혀주면 참고 또 참았던 그런 시절이 아니다. 뇌의 용량이 2MB를 넘는다면 누구나 눈치 챌 일이다.

그런데 밀어붙인다. 사람들이 여럿 죽어 나간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시민’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국회의원마저 경찰에 맞고 끌려간다. 한국은, 이명박 집단과 경찰들만의 땅이었단 말인가. 정말 그렇게 해서 온전히 임기를 채우고, 나라가 돌아가리라 믿는다는 말인가.

세상이 달라진다.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당신이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역사는 2009년 오늘을 그런 날로 기록할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 순간,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남고 싶은가. 가능하지 않다고 믿었던 일들이 가능한 시대가 왔다. 내 땅에서도, 그러기를 바란다.

200만의 인파를 앞에 두고 연설하는 이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4000만을 적으로 돌리고 숨어 사는 이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Written by camino

January 21, 2009 at 11:23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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