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어김없이, 올해도 돌아왔다. 할 수 있는 것은 기억하는 것 뿐이라고, 잊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2009년 5월, 기억하는 것조차도 이제는 힘들어지는 것인가. 살인자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던 자가 떳떳이 고개를 들고 ‘민주’운운하는 이 뒤집힌 세상에서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다시 몇십년이 흐른 뒤, 2009년 그날 무엇을 했는지, 가슴을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답변
이 글은 제 미투데이에 3s님이 남겨주신 댓글에 대한 답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의미에서 회의가 생깁니다.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 ‘전진’한 것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후진’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의문의 출발점입니다. 사실, 저는 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될 리가 만무하다고 믿었던 사람인데, 이는 적어도 압도적 다수는 아니라고 해도 다수에 의해서, 그래도 보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적으로 보이는 대통령을 둘이나 당선시킨 경험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노무현에게 표를 주었던 사람이고, 그리고 노무현에게 실망도 많이 한 사람입니다만, 제가 노무현을 지지했던 그 어느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저는 이명박을 지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상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제가 순진하게 믿었던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터무니 없는 방향으로 흐르더군요. 이명박을 당선시킨, 다시 말해 이명박에게 표를 던진 이들 중의 상당수는 그 전의 대선에서 노무현에게 표를 준 사람들일 것입니다. 산술적으로 그렇지요. 그런데 이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이명박은,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노무현이 상징한 모든 것에 반하는 인간인데, 그러한 사람에게 투표하는 정치행위가 일어나는 사회가 한국 사회입니다. 민주주의가 전진했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조금이라도 작동하고 있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닐까요.
물론 이명박의 등장과 당선을 경제라는 말로 설명들 하지요. 경제나 좀 살려보자고 다른 허물들에는 눈을 감아 준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 어느 민주주의에서 그런 일이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경제가 중요하고,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굶어 죽을 지경의,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인구가 그리 많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다시 말해, 경제가 문제이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리고 적어도 지난 대선의 시점까지는, 한국 사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최소한 ‘생존’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내세우는 반민주적인 인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런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라고 과연 부를 수 있을까요. 또 하나의 의문입니다.
나아가서는, 지난 10년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87년 이후에, 적어도 ‘절차상의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들이 자주 회자되곤 했습니다만, ‘절차상의’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그 단계에서 이미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는 아님을 인정하는 셈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지난 정권 하에서도 천성산 문제, 한미 FTA 문제, 대추리 문제 등등 매우 많은 비민주 혹은 반민주적인 행태가 있었습니다. 이라크 파병의 문제도 있었지요. 국가보안법 같은 구시대의 유물조차 되지 못하는 쓰레기를 치우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정권을, 그 전의 정권을 민주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현 정권같은 무식하고 처참한 수준은 아니었지요. 그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독재정권이 아니라고 바로 민주정권이 되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금은 이명박의 무리들에게 저항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전선이 분명할 때는 힘을 집중해야 합니다. 이명박만 없어지면 세상이 나아질 것으로 믿는 순진함은 버려야지요. 그러나 이명박이 없어지면, 그만큼은 분명히 세상이 나아질 것을 믿습니다. 다만, 이명박을 비판하면서,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그보다 그리 낫지도 않았던 지난 10년의 시절에 우리가 많은 것을 이루어왔다고 믿는다면, 결국 우리는 철저한 반성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명박이 세상에 나와서 대통령이 된 것은, 우리 사회가 그것밖에 안되는 사회이기 때문이겠지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명박 한 명이 사라지는 것 보다 더욱 확실하고 탄탄하게, 다시는 이명박과 같은 이가 얼굴을 내놓을 수 없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위해서, 저는 감히 지난 10년을, 나아가서는 지난 수십년을 철저하게 반성해야한다고 믿습니다.
(3s님께,
미투데이에서 답을 작성하다가 터무니없이 길어져서 이렇게 씁니다. 그냥 순간적으로 평소의 생각을 썼습니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부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다른 생각이나 의견, 지적 모두 환영합니다. 언제든 말 걸어 주십시오.)
알리는 글
얼마나 계신지 모를 구독자들께 알립니다.
블로그를 방치한 지 한달이 넘습니다. 그간 저는 미투데이와 Tumblr에 꾸준히 흔적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계속 이런 체제가 유지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블로그를 완전히 정리하거나, 혹은 포기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유 –시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가 생겨서, 조금 긴 글이 나오면, 그것은 이 공간에 저장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사소한 일상의 잡담들이나, 취미의 수준조차도 되지 못하는 사진들로 이곳을 채우는 것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는, 블로그를 통해서 용돈을 벌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이루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간을 여러 해에 걸쳐서 유지해 오고, 또 유지해 나가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행위가 즐겁고, 또 어떻게든 세상을 향해 ‘말’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욕구가 없어지지 않는 한, 즐거움이 괴로움이 되지 않는 한 제 ‘말’은, 그 형태가 어찌 되든 계속 될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은, 확고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추측컨대 이 블로그의 구독자 분들은 소수일 것이고, 또 저의 행적(?)을 잘 알고 계실 것이기에 굳이 이런 알림글을 쓰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떤 경우에나 예외는 있을테고, 또 그보다도 저 스스로 이렇게 획을 긋고 동서남북을 정리하려는 의도로 이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사소한 저의 흔적들로 통하는 링크를 알려드리고 글을 끝내겠습니다.
어린 기억, 2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가 처음 국민학교(당시)를 들어갔을 적에는 보통 학부모가 –대부분 학생의 어머니들이지만– 사나흘이나 일주일 정도 학교에 따라오곤 했다. 처음 학교라는 데를 들어간 어린 아이들의 적응을 위해서였으리라. 어린 나는, 학교를 처음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사를 한 지도 얼마 안되었고,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않지만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다.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보다 한참을 더, 한 두주일 가까이 학교에 같이 따라왔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지 않았던 첫 날, 내가 학교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던 것은, 기억에 있다. 그러나 물론 곧 그런 ‘부적응’ 기간은 지나간다. 이름들까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내 친구들이 생겨서 학교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이리저리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돌아가곤 한 기억도 난다.
대구라는 도시에 가서 처음 살았던 아파트는, 아직도 –2008년 여름– 그대로 있다. 그 시절에만 해도 아파트, 특히나 1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곳은 새로 지은 ‘고층’의 아파트였는데, 방이 세개인 자그마한 곳이었다. 기역자의 건물 한 동이었는데, 요즘의 아파트들보다 정원도 꽤나 넓었고 매우 널직한 놀이터도 있었다. 넓은 정원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국민학교 2학년 때인가, 어느 겨울 대구에 눈이 왔었다. 그 즈음의 대구는, 눈이 내리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어서 눈이 온 것이 꽤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해 겨울, 바로 그 때 난 감기에 걸려있었다. 집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고, 동생만 나가서 눈사람을 하나 저 혼자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의 동생 사진이, 아직 서울집 앨범들 사이에 남아 있다. 빨간 모자달린 코트를 입고 볼까지 빨개져서 웃는 동생 사진이 말이다.
처음 대구로 이사를 가고, 처음 학교라는 데를 가면서 어린 나는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그 중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 내 말투였다. 학교에서는 주변의 누구를 돌아보아도 대구 사투리. 어린 마음에 혼자 다른 억양의 말을 하는 것이 대단한 스트레스였다. 얼마나 그게 심리적인 부담이었으면 집에서 외출하기 전에 꼭 대구 억양을 연습하곤 할 정도였다. 어린 내가 연습을 한들 제대로 흉내를 낼 리는 만무했지만, 그렇게 남들과 달라보이는 것이, 어릴 적에는 심리적인 부담이었다. 물론 내성적인 내 성격 탓도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사투리 문제’는 이내 해결이 된 듯하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다들 사투리를 쓰니 자연스레 입에 익었던 것 같다. 다만, 집에서는 예전에 쓰던 말을 그대로 썼던 탓에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는 ‘두가지 말’을 동시에 쓰며 살고 있었고, 훗날 친구들 앞에서 집에 전화라도 할라치면 신기한 놈이라는 눈초리를 받곤 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내 동생에게도 그런 말의 구별은 있었는데, ‘대구 억양’을 사용하는 대상이 세상에 유일하고 그 대상이 바로 저의 오빠라는 사실이다. 나는 불과 몇년 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와 나의 차이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훗날, 대학에 들어가고나서 주변의 말투가 다시 바뀌자 자연스레 집에서 쓰던 말이 밖에서도 쓰는 말이 되어버렸는데, 그 탓에 대학에서 새로이 만난 친구들에게도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으면서도 사투리가 없는 신기한 놈이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처음 들어간 학교는 그리 오래 다니지 못한다. 내가 3학년 때 우리 식구는 미국으로 이사를 한다. 아버지의 공부를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직 외국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까지야 그런 사실을 그때는 몰랐지만, 정작 출국하기 전에 서울에서 한달 넘게 머물러야 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온갖 수속들 때문이었으리라.
서울에서는 외가에서 지냈다. 바로 그 무렵이었는데 어느 날 오후, 외가의 거실에 켜놓은 TV에서 실제 공습경보가 나왔었다. 실제상황이라는 다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모두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다만, 내 외조부만은 급히 일어나셔서 아이들에게 긴소매 옷을 입히라고 하시며 당신도 잠바를 꺼내 입으셨다. 놀라고 당황한 탓이었을까. 외조부모 앞에서 난 참으로 이기적인 한마디를 해버린다. 요컨대 우리가 미국에 가기 직전이었다는 이야기다. 이 경보는 결국 북에서 귀순해오는 전투기 탓이었고,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난 오늘까지도 이날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제는 두분 다 돌아가셨지만, 나의 외조부모는 그 어린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날, 웃으시던 외할머니 얼굴도, 기억에 있다. (이어짐)
어린 기억, 1
난, 1970년대에 태어났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신기하게도 만 두살 이전이다. 갓 걸음마를 하던 시절일 것으로 추측하는데, 내가 나서 한두해 살았던 집의 앞마당에 놓여져 있던 물통 안을 들여다보던 기억이 있다. 물론, 이 기억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서 그 다음의 그 시절과 그 집, 그 마당에 대한 기억은 더는 없다. 가끔 이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머리 속에 의식하는 기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기는 서울에서 났지만,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곧 대전으로 이사를 간다. 빠듯한 살림의 젊은 부부였던 내 부모는, 몇차례 대전에서 이사를 한다. 셋방살이를 한 적은 없다고 알고 있지만, 그리 길지 않은 동안 전세살이를 벗어나지 못했었던 것 같다. 내가 서너살 쯤 이사한 곳에서, 이삿날 어머니가 막 이사 들어온 집의 마루에 앉아 나와 내 동생에게 이곳이 ‘진짜 우리집’이라고 말하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간 살아 온 다른 집들도 우리집은 우리집이었는데 하고 말이다. 아마도 그 집이, 내 부모가 처음으로 제 소유로 만든 집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대전이라는 도시의 기억은, 마치 무성영화나 매우 낡은 사진 같은 느낌만 남아있다. 우리 형제가 어머니 손을 잡고 다니던 소아과 병원, 조금 어두운 그 병원 진료실 안의 아기용 체중계, 여름철이 되면 내다 걸리던 냉면 깃발, 내 부모가 다니던, 그리고 우리도 따라가서 앉아 놀던 테니스 코트 같은 것들이 단편적인 장면들로 남아있다. 무척이나 고요하고 느리게, 그렇게 지나가던 세월이었다.
그런 대전의 기억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자주 집으로 들이닥치던 아버지의 학생들이다. 나의 아비는 젊어서부터 줄곧 대학에서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시절에는 정말 매일같이 학생들이 집까지 와서 놀다가곤 했다. 내 아비가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인 탓도 있겠지만, 아마 그 학생들과 별로 나이 차이가 없었던 덕이기도 했을 것이다. 대전에 우리 가족이 살던 시절, 나의 아비는 지금의 나보다도 젊은 서른 전후의 나이였다.
자주 우리집을 드나들던 학생들은, 나와 내 여동생을 귀여워해주었다. 그러나 우리 형제는 어려서는 무척이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어머니 뒤에 숨거나 심지어는 집 거실의 커텐 뒤에 숨어서 그들을 피하곤 했다. 어린 우리들의 그런 낯가림이 가끔은 웃음거리, 재밌는 화제가 될 정도였다. 아직도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학생들은, 그리고 아직도 아버지와 교류가 있는 학생들은 그 시절에 나를 귀여워해주던, 그들 뿐이라고 알고있다.
아직 70년대가 끝나지 않았던 어느날 우리 가족은 다시 수도권으로 이사를 한다. 1년 남짓,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부천에 자리를 잡는다. 아버지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여자 대학에서 가르치고, 이 즈음부터 어머니도 시간 강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어린 나와 내 동생은, 어머니가 어딘가 고정적으로 나가는 데가 있는 것이 싫었다. 어디 가냐고 묻고 학교 다녀온다고 대답하면 우리 형제가 싫은 티를 내서 그랬는지, 어느날인가 하루 어머니는 학교에 가면서 다른 곳을 간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거짓말을, 좀 지나 알게 된 나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내 부모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 이전의 나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의 구체적인 내용도 어떻게 그 거짓의 진실을 알게 되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당시의 충격만은, 선명하다. 그 충격이 내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 즈음 또 하나 커다란 충격을 받는 일이 있다. 얼마 전에도 썼던 것처럼 나의 외증조부가 돌아가시는 일이 그것이다. 외증조부와 심리적으로 전혀 가깝지 않았었지만, 그렇게 나는 죽음의 존재를 배운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나 자신 또한 유한한 존재라는 자각을 수반했던 것 같다. 이렇게 숨쉬고, 웃고, 떠들고, 놀던 내가 언제인가 없어진다는 사실, 그리고 세상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제 갓 유치원을 다니던 아이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다. 일주일 남짓, 침울하게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그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나를 괴롭히던 영상과 상상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그로부터 여러 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극복하고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일상적’으로 의식하는 내 버릇은, 이 때 시작된 것이 아닐까.
부천에서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은 마당이 꽤 넓은 집이었다. 마루에서 내다보이는 정원에는, 아버지가 사와서 심은 나무도 있었고, 마당이 넓었던 덕에 나와 동생은 마당에서 노는 게 일이었다. 숫기 없는 내 성격 탓에 유치원을 다니면서도 나는 그다지 친구가 많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내 가장 좋은 친구는 나보다 한살 어린 내 동생이었던 것 같다. 조금 더 크면서, 그리고 그 이후 한참 동안 늘 오빠 때문에 고생이 많은 동생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같이 잘 놀았다고 기억하는 저 시절부터 이미 동생은 나 때문에 이런저런 괴로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천에서는 그리 오래 지내지 않았다. 아버지가 대구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셨기 때문이다. 그 탓에 나는 다니던 유치원을 제대로 졸업도 못하고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이사간 대구에서 나는 국민학교(당시)에 입학한다. (이어짐)
**왜 이런 개인적인 기억들을 줄줄이 늘어 놓을 생각이 들었는지는 설명하기 힘들다. 어쩌면, 어수선한 세월에 지난 시절들 돌아보다 그리 된 것인지도 모른다. 동기와 이유가 어떻든, 짧게나마 기억들을 기록해 둘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쓰다보면 막히기도 하고, 지겨워지기도 하며, 의욕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미리 예고하지 않는다. 그저, 기약없이 이어진다고만 해 두자.